| 개발자 책꽂이 |
1차 세계대전 참호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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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성 yooseong@gmail.com
필자는 데비안과 오픈 소스 운영체제에 관심이 많으며 과외로 인문학을 공부하며 과학을 주업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연구원이다.
2009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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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에서 보낸 1460일 외>>
존 엘리스 지음, 정병선 옮김, 마티 펴냄
2010년이면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주년이 된다. 참여정부 말기에 남북 관계가 호전되면서 현재 남북 사이의 정전 상태를 끝내고 종전 상태로 바꾸자는 노력이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아쉽게도 정권이 바뀌고 대북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게 되면서 무의미해졌다. 거기에 북한은 계속 미사일 발사와 핵무기 개발을 진행해 나가면서 남북한 사이의 긴장 상태가 다시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자 한국에 전쟁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오는 게 현실이다. 전쟁 가능성이 점쳐진다 해도 실제로 전후 세대 한국인들은 전쟁을 한낱 남의 이야기로 흘려 보낼 수 있다. 전쟁에 대해 항상 긴장하지는 않아도 전쟁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재앙은 늘 생각해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유럽 사람들은 이전 세기에 일어난 전쟁을 가볍게 생각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이 준 잔인함은 그들을 충격과 공포의 상태로 몰아넣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길게는 몇 달 안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 생각하면서 자기와 전쟁은 무관하다고 여겼던 유럽인들은 전쟁이 수년간 지속되리라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다.
전쟁이 길어지자 참전한 병사들은 극한의 상황에서 육체적, 심리적인 공황 상태를 경험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설명하는 책이 이번에 소개할 <<참호에서 보낸 1460일>>이다. 이 책의 부제는 “사상 최악의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의 실상, 트렌치코트에 낭만은 없었다!”이다. 당시 사람들이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가졌던 전쟁의 막연함이 전쟁이 보여준 무자비함으로 변했음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때는 늦었다. 이 책을 통해 그들이 겪었던 전쟁의 잔혹함을 간접적으로나마 알아보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책의 목차를 살펴보자. 1~2장은 전쟁의 모습을 담고 있다. 1장은 참호 구축과 자연 지세(地勢)를 조사하고 파악함으로써 전쟁에 자연 자원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알려준다. 2장은 전쟁에서 활용할 전략•전술, 전투에서 나타난 전쟁의 실상을 보여준다. 3장은 병참 생활의 주무대인 참호 속 생활에 관한 소문과 그 진상을 알려주며, 4장은 참호 속 병사들이 느낀 전우애란 무엇이며 전쟁에 참여하면서 느낀 애국심이 조국에 대한 환멸과 항의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준다.
책의 내용을 다 읽을 시간이 없다면 책 중간중간에 실려 있는 사진만 보더라도 1차대전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진흙탕이 되어버린 참호 속을 뛰는 병사, 전사한 독일군을 뜯어먹는 파리떼, 참혹하기로 유명한 솜강 전투, 전투가 끝났으나 여전히 들판에 버려진 병사의 시신들, 치료를 받으려고 공터에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병사들의 사진이면 1차대전의 참혹함을 그 자체로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렇듯 전에 없던 살육과 단순한 보병들이 주축이 된 돌격전은 무의미해졌고 참호 안에서 적의 공격 분쇄에 힘을 쏟은 전쟁 양상에 군인들이 느끼는 공포감은 극에 달했다.
우선 이런 공포를 일으킨 참호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대개 점토로 만든 참호는 보통 2m보다 좀 더 깊었고 너비는 2m 내외였다. 벽은 총탄이나 포탄 파편의 충격을 줄이려고 최대한 두껍게 만들었다. 이런 구조의 참호는 직선 형태가 아니었다. 직선 형태는 적에게 쉽게 뚫리면 속수무책이 되므로 참호는 작게 나뉘거나 구불구불한 형태였다.
병사들은 참호에 앉아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특히 초병들은 참호 안에서 “절대 고독의 상태에 놓여 있었고 야생 동물들이 조금만 움직여도, 달빛에 나뭇가지가 조금만 흔들려도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참호에 반드시 필요했던 다른 형태의 구조물이 대피호였다. 대피호라고 해서 오랫동안 전투를 피해 쉬는 그런 장소는 아니었다. 특히 항상 물이 고여 있어 병사들은 온갖 질병에 쉽게 시달렸다.
참호나 대피호가 병사들에게 최악의 장소였다면 아군과 적군이 만든 참호 중간에 있던 무인 지대는 어떠했을까? 서로를 항상 경계했으나 아군과 적군 사이의 거리가 500m 미만이었고 언제 서로 침투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를 막고자 기본적으로 철조망을 칠 수밖에 없었다. 철조망의 길이는 수m에서 30m까지 길이가 다양했고 견고했다. 이렇게 이루어진 참호 지형은 연합국 측에서 만든 길이만 “2만 4000km”에 달했다. 여기에 쓰인 물자의 양은 이 길이로만 생각해도 엄청 났을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실제 1914년부터 종전까지 전선에 “보급된 삽과 가래의 양은 1063만 8000자루”에 해당했다.
많은 사람의 노력과 자원으로 지어진 복잡한 참호에 있던 군인들은 실제로 적군을 본 날 수가 많지 않았다. 실제로 참호에 있었던 날은 약 231일이었고 안전한 곳에 있었던 날이 약 183일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참호 속 생활이 그리 힘든 게 아니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병사들이 힘들어 했던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병사는 한 참호에서 계속 있지 않았다. 참호 근무는 순환 근무였으며 “병사들은 동일한 구역에서조차도 참호에서 막사로, 다시 새로운 참호로 그리고 다시 새로운 막사로 계속 이동했다.” 앞서 언급했지만 참호 속 길은 항상 축축한 진흙 상태였다. 아무리 건장한 젊은 병사들이 전쟁에 참여했다지만 이렇게 진흙탕으로 된 길을 며칠씩 쉬지 않고 걷기란 쉽지 않았다. 여기에 20~30kg에 달하는 군장까지 짊어졌다. 보통 한번 이동하면 약 30km 내외를 움직였다. 잠시의 휴식도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여름에는 특히 병사들이 “낙오하거나 졸도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런 병사들에게 더 가혹한 것은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 완전 군장을 하고 다섯 시간을 더 도보 행군을 시키거나 의식을 잃은 병사는 8일간 외출을 금지 당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벌칙이 아니었다. 문제는 진흙이었다. 진흙에 빠져 나오지 못해 탈진과 익사로 죽는 병사들이 생겨났고 죽지 않는 경우는 거의 이틀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진흙 속에 갇혀 있는 경우도 생겼다. 적군과 싸우다 죽는 일보다 진흙에서 빠져 나오는 일이 아군에겐 더 두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실제 이렇게 진흙에 빠졌다 구조된 병사들은 오래 살지 못했다. 살아남은 병사라도 바로 얼마 동안 자신이 살아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비에 젖어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트렌치코트는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의 무게가 되어버렸고 진흙과 비 때문에 물에 젖은 전투화는 고질적인 발의 질병을 가져왔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젖은 부츠와 양말에 싸인 발은 신경이 마비되고 염증이 생겨 악화되면 괴사하고 발가락과 발을 절단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전쟁 초기에는 이 문제가 대수롭지 않았으나 전쟁이 일어난 다음해인 1915년에는 수천 건에 이르러 전력 약화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결국 부대 전체가 나서서 해결해 보려고 했으나 만족스런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겨울이 되자 상황은 더 악화되었고 병사들은 죽음에 한 발짝 더 다가간 꼴이 되었다. 여기저기 참호 속에 버려진 오물과 배설물, 시체는 장병들을 전투가 아닌 이유로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들에게는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의 공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그런 공포에 더 추가될 공포가 있을까 의심할 수 있겠지만 더해진 공포는 그들이 전투 중이라는 것과 직접 관련이 있다. 바로 포격의 공포가 그것이다. 참호와 대피호, 철조망으로 이루어진 전쟁터에서 적에게 손상을 입힐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포격이었다. 문제는 포탄이 항상 적진에 있는 참호 속으로만 들어가진 않는다는 것이다. 참호 속에 있던 병사들은 아군 진영에서건 적군 진영에서건 포탄이 발사되면 누구나 공포에 떨었다. 적군의 포탄이 아군 진영에 떨어져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과 함께 포탄의 정밀도가 떨어진 상태이면 아군이 쏘아 올린 포탄도 아군을 죽일 수 있었으므로 병사들은 항상 포탄 소리가 들리 때면 언제 어디서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이런 종류의 포격을 경험한 병사들은 육체적인 고통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정신적 고통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정신적 고통의 주된 시발점은 바로 포탄 소리였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그 정신적 충격은 실로 죽음보다 더했다.
여기에 전에 없던 또 다른 공포가 더해졌다. 바로 독가스 공포였다. 독가스에 노출된 병사들은 자신들이 손을 쓸 수 없이 그저 죽음을 맞이 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병사들은 온몸에 화상 투성이었고 겨자 색깔로 곪아터진 물집 투성이다. 그들은 숨을 쉬기 위해 노력했지만 목소리는 기어들어갔고 결국 그러다 질식하여 숨을 거두었다.”
전쟁이 가져온 이러한 공포는 전쟁이라면 자연스럽게 생각하기 마련인 적군과 아군 사이의 전투에서 생겨나는 공포와 비교하면 어땠을까? 실제 전투는 정찰 활동이나 습격전을 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독일군과 연합군 정찰병끼리 무인 지대에서 만났을 때는 놀랍게도 서로 총격을 가하기보다 그냥 다시 자신들의 참호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철조망을 만들 때도 적군끼리 만나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서로 신경 쓰지 않고 자신들의 작업에만 열중했다. 앞서 언급했던 공포는 없었던 것 같지만 전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번씩 정찰을 다녀온 병사들은 그 긴장감 때문에 “소모성 탈진”에 시달리기도 했다.
실제 적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도 않을 작전을 왜 수행했을까? 이러한 전투 작전은 적군이 위치한 진지에서 중요한 군사적 기밀을 가져올 수 있다는 성격을 나타낸다고 했다. 그런데 일반 병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다만 참모 장교들의 경쟁의 소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이 군 내부에 확산되자 장교나 사병이나 모두 이런 정찰이나 습격성 군사 활동은 자제했다.
“Great War”[1] 라고 불릴 정도로 20세기의 시작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전쟁에서 장교들은 왜 이렇게 답답한 행동을 보였을까? 그들은 새로운 전쟁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전술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설령 그들이 총력전이라는 현대전의 개념을 차츰 습득했더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19세기 습관을 지울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계급 제도를 절대적으로 따르고 연공서열에 대한 경직된 사고 방식으로 인해 장교로서 보여야 할 “독창성과 솔선수범의 자세”는 그들에게서 찾기 어려웠다.
일부 젊은 장교들이 보여주었던 개혁 성향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상급자들 때문에 좌절됐다. 상급자들이란 귀족 집단으로 두 차례 혁명과 민주주의 이데올로기가 퍼지면서 군의 수뇌부를 장악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에게 전술과 전략이란 무의미했다. 그저 경례를 누가 더 잘하고 못하냐가 더 중요했다. 그들에게 전쟁 기술이란 그저 나폴레옹 전쟁의 워털루와 그 이전 기억에 머물러 있었다. 당연히 그들에게 전쟁은 그저 돌격해 육탄전을 하고 깃발을 적진에 꽂는 것이 전부였다. 무기가 발달하면서 단순히 사람의 몸뚱이만 믿고 뛰어나가는 방식은 병사들의 의미 없는 죽음만 낳을 뿐이었다. 1차대전과 얼마 안 되는 시간 간격을 두고 일어난 두 전쟁, 러일전쟁[2] 과 보어전쟁[3] 을 그들은 무시했거나 잊어버렸다. 이 “두 전쟁은 모두 보병 화력의 새로운 지평과 참호 구축 작업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예였는데”도 말이다. 인간의 용기와 의지만을 강조한 전술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그럼에도 많은 장성이 전쟁 수행 방법을 바꾸려고 하지도 않았고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상관 아래에 있던 사병들의 사기는 당시 가장 위력적이었던 무기인 맥심기관총[4] 의 사수들이 눈에는 그저 측은한 마음마저 들게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맥심기관총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 기관총은 실제로 모든 전장에서 가장 두려운 무기였다. 전쟁 초기에는 독일군의 기관총이 아무리 뛰어나도 오직 신과 용기만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연합군 장성들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다만 병사들의 시체만 쌓여갔다. 연합국 측 사상자는 며칠 사이 전투에서 수천 명에 달했다. 이 책의 기록에 따르면 “최초 전투 개시 2시간 만에 영국군은 1945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하루 동안 육해공 3군이 잃은 병력보다 많은 병력을 1차대전 초기에 잃었다.”
전투 초기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을 치는 건 시간 문제였고 이제는 독일군의 총알받이가 되는 순간보다 참호에서 밖으로 뛰어나가라는 명령을 기다리는 공포가 이미 병사들을 반사(半死)의 상태로 만들었다. 이러한 죽음이 ‘개죽음’이라는 것을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누구를 탓할 수도 탓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당장 처할 죽음보다 전장에 뛰어나가지 않을 때 주위에서 받는 시선이 더 무서웠다. 그들은 속으로 “동료들에게 겁쟁이로 낙인찍히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저 돌격의 타성에 젖어 움직이는 “좀비” 같았다.
지금까지 언급했던 전쟁의 공포가 4년여 지속되는 상황에서 군인들은 계속 이러한 공포에 시달렸을까? 그들의 공포도 전투 중에 잠시 쉬면서 먹는 빵이나 술, 고향에서 온 편지를 당해낼 순 없었다. 거기에 자신이 고향에 살아서 돌아가건 죽어서 돌아가건 그들에게 돌아올, 그들이 보여주었던 애국심과 명예는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주었다. 이들의 삶을 좀 더 지탱해준 몇 가지 것을 조금씩 살펴보자.
전투와 진흙탕에서 살아나려면 먹는 일이 가장 우선시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배급 받았던 음식이 정말 형편없었다는 데 있었다. 빵은 하루 이틀 지난 것도 아닌 일주일 지난 것이라도 먹을 수 있다는 데 병사들은 감지덕지했다. 단백질 보충용으로 콩과 고기가 나왔는데 전투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콩과 고기를 씹을 시간은 없었다. 그저 삼키기 바빴다. 이러다 보니 배탈이 나기 일쑤였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냥 배설물에 섞여 나오는 일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식수가 깨끗하길 바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안 마실 순 없었다. YMCA나 적십자에서 제공받는 음식이나 집에서 부쳐준 음식을 먹을 때는 그나마 사정이 좋은 때였다. 음식이 맛이 있건 없건 간에 모든 사병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음식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이를 전우애라고 할 수 있겠으나 더 실제적인 이유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항상 참호에서 이동을 해야 했던 그들에게 그들이 지닌 음식은 짐이었다. 여기에 추위를 견디게 하고자 지급되었던 술은 큰 문제가 안 되는 한에서 모든 병사가 즐겼고 실제로도 술 때문에 빚어진 큰 사고는 없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음식과 술이 장병들에게 짧은 휴식을 줬다면 고향에서 온 편지는 그들에게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그들은 쉴 때면 언제나 편지를 쓰고 읽었다. 매주 1250만 통의 편지가 전선으로 배달되는 상황이었다. 보통의 경우도 이런데 크리스마스 때는 우편물이 폭주했다. 편지와 함께 전달된 소포가 상당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편지와 소포를 뜯어 보는 시간은 언제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편을 취급하는 일은 어떤 일보다 우선시되었고 신속하고 정확하게 우편물이 전달되는 데 우편 취급 부서는 전력을 다했다. 실제로 분실되는 편지는 거의 없었고 전쟁에서 퇴각하는 과정에서조차 잃어버린 우편물은 우편 행낭 세 개에 그쳤다.
그러나 문제는 병사들이 자신들의 가족들에게 쓰는 전쟁과 참호의 실상이 실제와 다르게 전달되었다. 그 이유는 단순히 가족들에게 자신이 안전하다는 안도감을 건네주려는 의도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전쟁 병력을 꾸준히 조달하려면 전쟁 실상을 외부에 알리지 않아야 하는 상부의 의도가 숨어있을 수도 있다. 어떤 의도건 편지의 의미는 전장에 있던 장병들에게 가장 달콤한 사탕이었음에는 틀림없었다. 이렇듯 병사들은 음식과 편지, 휴식으로 전쟁의 괴로움과 공포를 잠시 동안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1914년 전쟁이 시작됐을 때만 해도 누구도 1460일간 전쟁이 지속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전쟁 초기 유럽 각국은 “자국의 전몰병사들을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영속적인 존재로 미화”했다. 하지만 총력전으로 일컬어질 정도의 전쟁 양상과 병사들이 느낀 공포감이 차츰 알려지면서 전쟁의 참혹상은 후방의 민간인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이러한 정신적 충격은 “국민국가의 방위라는 신성한 임무수행”으로 완화됐다. 유족과 동포들은 가족을 전쟁터로 내몬 국가를 비난하기보다 전사자들을 위해 “영령추모와 제사”를 통해 애도의 뜻을 보였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충성과 명예심은 거꾸로 국가에 대한 환멸과 항의로 바뀐다. 이러한 과정은 여기서 설명하지 않고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남겨두겠다.
에릭 홉스봄이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 일컬었던 이유는 이전까지 없었던 충격과 공포를 두 차례 세계대전이 가져다 주었고 그 여파가 사람들의 생활과 심성 구조를 뿌리부터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전세계는 두 차례 세계대전의 충격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한국만큼은 여전히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바로 한반도의 분단 상황 때문이다. 한국민들은 21세기를 산다고 하나 ‘극단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 대한 긴장감을 항시 늦출 수 없는 시점에서 <<참호에서 보낸 1460일>>을 통해 전쟁이 주는 참혹함과 교훈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참고문헌
- 다카하시 데쓰야(지음), 이목(옮김), [[국가와 희생]], (책과세계)
- 존 키건(지음), 정병선(옮김), [[전쟁과 우리가 사는 세상]], (지호)
- 에릭 홉스봄(지음), 이용우(옮김), [[극단의 시대]] 상,하 (까치)
- 존 키건(지음), 정병선(옮김), [[전쟁의 얼굴]], (지호)
- 칼 클라우제비츠(지음), 김만수(옮김), [[전쟁론]], (갈무리)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지음), 홍성광(옮김) <<서부전선이상없다>> (열린책들)
주
[1]1차 세계대전은 아시아나 북미에 큰 영향이 없었던 반면 유럽에서는 19세기를 끝장내버리는 그야말로 "Great War"였고 19세기에 발발한 어떠한 전쟁보다 충격과 공포가 전 유럽을 흔들었다.
[2]러일 전쟁(러시아어: Русско-японская война, 일본어: 日露戦争)은 1904년 2월 8일에 발발하여 1905년 가을까지 계속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의 전쟁으로,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B%9F%AC%EC%9D%BC_%EC%A0%84%EC%9F%81
[3]보어전쟁(Boer War, Anglo Boer War) 또는 앵글로 보어전쟁은 영국과 당시 남아프리카 지역에 정착했던 네덜란드계 보어족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B%B3%B4%EC%96%B4%EC%A0%84%EC%9F%81
[4]1860년대 J. 개틀링이 만든 개틀링 건에 이은 근대식 기관총이다. 급탄 방식을 이용하여 1분에 600발 정도를 발사할 수 있었던 세계 최초의 완전자동식 기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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