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개발자 책꽂이 |
2009년 한국인에게 경제란 무엇일까, Part 2 |
 |


양유성 yooseong@debian.org
필자는 데비안과 오픈 소스 운영체제에 관심이 많으며 과외로 인문학을 공부하며 과학을 주업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연구원이다.
2009년 4월 28일
|
|
 |
|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책세상 펴냄
지난번에 소개한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에서 언급했듯이 이상적인 그리스인의 삶은 “폴리스적인 삶과 가정경제간 호혜적인 선물 교환”을 축으로 하는 삶이었다. 그들의 삶에서 경제적 삶의 중심에 있던 아고라는 단지 “일반시민에게 식량을 분배하는 다른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즉, 아테네 문명이 이룩한 높은 수준에 비례하여 시장도 이렇게 되었으리라 짐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과 같이 성장하는 것이 아닌가? 21세기 현재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국가들, 예를 들면 G7에 속해 있는 국가들을 다른 국가들과 구별하여 묶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국가의 경제력이다 - 국민의 경제력이 아닌 ‘국가의 경제력’에 주목하자.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룩셈부르크나 북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G7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경제라는 개념이 국가나 사회의 하위 범주에 있다가 이젠 그 이상의 가치와 위력을 보여주는 것이 현실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현대 사회는 시장에 대한 맹신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장 숭배에 대한 반성은 현재 세계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로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요즘 여러 지면에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주는 학자가 소개되고 있는데 바로 칼 폴라니다. 이번에는 칼 폴라니의 저작 <<거대한 변형>>(홍기빈 씨가 번역하여 2009년 출간 예정)에 실렸던 글과 다른 글을 모아둔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를 통해 그의 날카로운 비판과 대안을 살펴보자.
우선 책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목차를 살펴보고 이번에 소개하면서 중점적으로 짚고 넘어갈 부분을 확인하자. 목차를 보다 보면 독자들에게 익숙한 ‘칼 마르크스’의 이름이 거론된 3장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철학과 경제학은 기본적인 지식이 요구되는 - 특히 <<경제학 철학수고>>에 관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이 부분은 건너 띄어도 좋다.[1] 그 나머지 장인 1~2장, 4~6장은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는 부분이므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꼼꼼하게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홍기빈 씨가 쓴 해제는 본문보다 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없는 독자라면 해제 부분만이라도 반드시 읽기를 권한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책의 내용에 들어가보자. 칼 폴라니가 그토록 비판했던 ‘시장’의 허구성을 우선 살펴보자. 폴라니가 지적한 시장주의는 개인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 그 핵심 원리로 작동하는 개념은 탐욕스런 지배자들이 지배체제를 통해 개입하지 않으면 시장은 “인간의 본질에 부합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자연스러운 사회체제”라는 것이다. 폴라니는 지금 현대인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 원리는 허구이며 신화에 불과함을 예를 들어 설명하며 인간 사회에서 경제의 위치를 재조명한다.
폴라니는 비판을 하기 전에 인간에 대한 의미 부여부터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폴라니는 어떤 사회체제이건 인간을 가장 근본적인 목적으로 삼는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의 삶에 특히 주목했다. 그가 생각한 인간다운 삶이란, “삶을 의미와 결단으로 채워나가는 인간의 모든 활동”이라고 하였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경제와 시장이라는 것이 이러한 인간적 삶의 한 가지 계기에 불과함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 이익 추구를 인간 삶의 본질적인 의의로 본다면 폴라니에게 있어 그런 삶은 죽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폴라니가 강조한 “인간의 모든 활동”에 주목해보자. 인간의 모든 활동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노동이다. 여기서 노동이란 혼자 집안에서 쓸 물건을 만드는 개인적인 활동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노동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동의 동기라는 것도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의미가 있고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여 자신이 속한 사회의 집단적인 문화와 가치 체계를 통해서만 그 의의”가 있다. 그리하여 “고대나 현대의 부족 사회에서는 개인적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천시하였는데 이는 이러한 행위가 사회 통합과 질서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협은 시장경제라는 것이 사회적 가치나 사회적 자본[2] 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났다. 즉 시장경제라는 개체의 존재를 마련해준 상위 개념인 사회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과다. 폴라니의 지적대로 역사적,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봤을 때, 인간 사회 속의 경제적 과정은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관계와 과정”의 한 계기일 뿐이다. 폴라니는 이를 “묻어들어가 있다”라고 표현한다. 그는 이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으로 인류학적인 관습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북아메리카의 콰키우틀족은 포틀래치[3] 풍습이 있는데 이곳의 추장은 1년에 한번씩 자신의 물건을 부수거나 나눠줌으로써 자신의 부를 과시한다. 이를 통해 추장으로서 지위를 공고히 다지는 한편, “경제적 재분배”라는 사회적 과정도 들어가 있다. 지난번에 소개했던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에서 말한 호혜성이 사회를 유지해주는 지지대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러한 모습은 구성원들이 경제적 활동을 사회적 관계로 인식하고 삶에 자연스럽게 내재되어 있지 않으면 힘들다. 또한 이러한 호혜적 행동은 그 행동이 나타내는 호혜성에 의미를 두었지, 그 수단이었던 경제적 성격은 드러나지 않도록 사람들은 주의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상대방이 포틀래치를 통해 받은 물건이 그 추장에게 다시 뇌물을 바치거나 아부를 더 잘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게 추장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이 호혜성이라는 사회적 관계와 무관한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은 그저 “순수한 물적 관계”다. 물론 ‘단골’이라는 개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것 또한 어디까지나 교환이 이루어진 물적 관계를 전제한다. 이러한 물적 관계가 사회 속에서 자리잡고 신뢰에 기초한 신용거래와 같은 사회적 자본의 한 가지 축이 된다면 환영할 일이다. 문제는 시장이 사회라는 틀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개체로 떨어져 나가 사회를 쥐락펴락한다면 그 때는 문제가 다르다.
어떤 시각에서는 이러한 시장의 독립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17~18세기 계몽주의 시기를 거치며 시장은 그 자리를 확고히 하기 시작했다. 바로 수량화 혁명 덕분이었다. 그러면서 고전파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이상적인 국가 형태는 역사적으로 자본주의가 사람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근대부터 시작됐고 시장은 사회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사회보다 우위에 서게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장 질서의 확립에 필요한 것 이외에는 자유방임을 원칙으로 삼는 최소의 정부”가 강조됐다.
그런데 폴라니는 이러한 생각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한다. 폴라니는 시장이 근대 서구 사회에서 주된 경제제도가 된 것은 적극적 국가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시장에서 이루어진 교환경제가 주요한 경제활동이 되려면 국가가 나서서 기존에 사회적으로 널리 퍼져 있던 호혜성에 근거한 경제체제를 재조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근대 국가는 근대 세계가 되면서 국가가 얻은 가장 중요한 권력인 정당한 폭력행사권을 통해 이를 이루었던 것이었다. 즉 최소 정부는 한낱 구호에 불과했다. 결국 근대 국가는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돈을 쥔 무시무시한 리바이어던[4] 이 됐다. 폴라니는 영국의 예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19세기 중반 자유무역, 금본위제, 구민법 철폐 등의 조치를 취했던” 영국은 시장 자본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법적인 장치를 확고히 했다. 즉 자유방임을 위한 국가계획이 바로 그것이다.
폴라니는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진단을 명확히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 시장 중심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문제들에 대한 처방을 내린다. 다시 말해 시장자본주의의 허구를 걷어내고 대안이 될 현실정치경제학을 확립하려 하였다. 폴라니의 현실정치경제학을 이해하려면 우선 “자기조정시장”이란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앞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폴라니는 기본적으로 시장경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시장이 전체 경제조직에 부수적인 요인이며 그 자리에 머물도록 사회가 조정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산업사회가 본격화되면서 시장에 필요한 “투입물과 산출물의 가격이 탄력적으로 결정될 필요가 생겼다.” 이를 위해 사회적 계약에서 벗어나 투입물과 산출물이 자신들만의 체계를 마련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자기조정시장”의 개념이다. 이 개념의 핵심 인자는 바로 우리가 경제 교과서에서 배웠던 노동(인간), 토지, 화폐(자본)인 것이다. 근대 세계 이전까지 이 세 가지 요소는 상품으로 본격적으로 취급되지 않았으나 시장자본주의가 자리를 확고히 잡으면서 다른 상품과 같이 취급되었다.
여기까지는 크게 피부로 와닿는 이야기가 아닐 수 있으나 실제로 투입물과 산출물에 붙여진 가격이 탄력적으로 매겨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겨나며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인간, 즉 노동이 상품이 되면서 자기조정시장은 노동마저 탄력적으로 운용한다. 바로 신자유주의가 가장 앞에 내세운 ‘노동의 유연화’가 등장한다. 당장 내일이라도 자신이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고용불안정에서 생겨난 개인적인 불안감은 사회적으로 쌓인다. 이러한 중압감은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나 국가 전체에 ‘존재론적 불안정’까지 가져다준다.
이러한 불안정성을 극복하고자 국가와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기업까지 노력을 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상황을 비추어 볼 때도, ‘일자리 나누기’, ‘재취업 교육’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근대 국가는 자유방임체제를 내세우며 시장자본주의를 유토피아로 상정하고 달려왔으나 그 과정에서 생겨난 부작용이 다시 국가 사회를 붕괴시킬 우려까지 낳았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 토대를 계속 유지시키려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다시 시장의 자기조정 기능을 약화시킨다. 시장자본주의는 이렇듯 자신이 태어난 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모순을 지녔다. 그렇다고 시장경제를 묶어두고 교제만 한다면 모든 계급은 살기 어려워진다. 이렇게 한쪽으로 조금만 기울어지면 그 균형이 무너져 사회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19세기 이후 자본주의는 이렇게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 해오고 있다고 폴라니는 언급한다.
그러나 실제 경제 상황은 시장의 자기조정 기능만이 강조되고 국가 정책이 병행되면서 경제 성장만이 인류가 살아가는 목표라는 맹목적 목적론에 모든 이가 정신을 잃고 있다. 경제 성장과 사회 안정이 균형을 이루며 전개되지 못하고 한쪽에 많은 무게가 실리고 있다. 2008년부터 불어닥친 세계 경제 상황 악화는 급기야 무게가 가벼워진 사회적 안정성에 위협이 되었다. 결국 그 사회 속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극단으로 치닫는 중이다. 2009년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자살이 급등하고 있다[1] 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폴라니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의 유연화와 같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는 상황을 몰아내고 다시 인격적 관계로서 공동체를 회복하자고 한다. 과거 올바른 인간 관계를 토대로 한 공동체 회복이 늦어진 경우 인류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그에 따른 뼈아픈 고통을 경험해야 했다. 시장경제가 자신을 내포하고 있던 사회를 계속해서 자신의 발 아래 두고 인간을 수단으로 여긴다면 또 다시 이러한 끔찍한 상황이 다시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결국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은 사회 속에서 지속적으로 호혜적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칼 폴라니의 생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폴라니의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와 홍기빈 씨가 쓴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한다>>를 같이 읽어보기를 권한다.
2회에 걸쳐 2009년 경제가 한국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되새겨 볼 수 있는 책 두 권을 소개하였다. 이 두 권을 통해 경제 성장만이 2009년 한국인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며, 경제를 “인간과 자연 환경 사이의 제도화된 상호작용”으로 이해하고 그 중심에는 항상 인간의 삶이 있음을 되새겨보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경제의 목적은 “단순한 이윤의 추구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잘 사는 삶’, ‘중용의 삶’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다카하시 데쓰야(지음), 이목(옮김), [[국가와 희생]], 책과 함께, 2008
- 스티브 툴민(지음), 이종흡(옮김), [[코스모폴리스]], 경남대학교출판부, 2008.
- 칼 마르크스(지음), 강유원(옮김), [[경제학-철학수고]], 이론과 실천, 2006.
- 앨프래도 크리스비(지음), 김병화(옮김) [[수량화 혁명]], 심산, 2005.
- 칼 폴라니(지음), [[사람의 살림살이]] 1, 2, 풀빛, 1998.
- 한스 피터 마르틴 외(지음), 강수돌 (옮김), [[세계화의 덫]], 영림카디널, 2008.
- 톨스타인 베블렌(지음), 이완재 외(옮김), [[한가한 무리들]], 동인, 1995.
주
[1]<<경제학 철학수고>>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2006년 이론과 실천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을 참고하라.
[2]신뢰
[3]포틀래치라는 말은 본디 치누크족 말로 '소비하다'라는 뜻이다. 축하연에서는 많은 음식물과 함께 사냥해 잡은 호랑이 모피, 모포, 동판(銅板), 때로는 통나무배 등을 손님의 지위에 따라 선물로 준다.
금액은 백인들이 금지하기 전에는 수천 달러에 이르렀다고 한다. 포틀래치에 쓸 재물을 준비하는 데는 축하연의 종류에 따라 가족•친척•마을 사람들이 협력하였고, 선물을 받은 사람은 받은 선물액에 일정한 이자를 붙인 만큼의 답례 축하연을 베풀지 않으면 체면을 잃고 때로는 노예 신분이 되기도 했다.
특히 친척이나 마을의 우두머리 자리는 그의 부친이 베푼 축하연의 규모•횟수 등에 의하여 결정된다. 포틀래치는 사회집단을 단위로 이해 관계를 가지고 하는 행사로서, 서로 체면을 잃지 않으려는 의욕 때문에 행사 개최의 주인공은 귀중한 재물인 통나무배나 그에게 속한 토템상을 새긴 동판을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일부러 파괴하거나, 소유하는 노예를 죽여 자신을 과시하기도 했다
[4]본래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영원히 산다는 거대한 괴물 이름이기도 하며, 홉스의 저작 제목인 리바이어던은 사람들이 계약에 의해 인위적으로 형성시킨 절대적인 힘을 뜻하는 말이다.
[5]박 법의관은 “경영난에 따른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면서 “의대 선배가 경영난을 비관해 링거로 마취약을 투여해 자살하고 부검대에 올라왔을 때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털어놓았다. http://www.memorialnews.net/news/article.html?no=1486
이 문서 북마킹 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