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 책꽂이 |
포크 커틀릿의 일본 지역화 버전(?) 돈가스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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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성 yooseong@debian.org
필자는 데비안과 오픈 소스 운영체제에 관심이 많으며 과외로 인문학을 공부하며 과학을 주업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연구원이다.
2008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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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가스의 탄생>>
오카다 데쓰 지음, 정순분 옮김, 뿌리와 이파리, 2006년 6월
일본은 1876년 조선의 문호를 강제로 개방하면서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1592년 임진왜란을 계기로 동아시아 지역의 ‘천하체제’에 도전하여 이 체제를 흔든 전력이 있던 일본은 결국 19세기 후반 청일전쟁(1894)에서 승리하면서 천하체제 붕괴를 가져왔다.
조선을 거쳐 청나라를 넘어 유럽 대륙까지 넘봤던 일본은 1905년에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서구 열강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다. 이러한 서구 세력에 대한 승리를 통해 가진 자신감의 이면에는 서구 문명에 대한 동경이 숨어있다.
이러한 동경은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나타났다. 일본은 메이지유신[1] 을 계기로 근대화의 상징인 공교육과 의회, 정부 수립 등을 단단히 한다. 제도적인 측면과 함께 일본은 서양의 앞선 문명과 기술이 서양 사람들의 뛰어난 두뇌와 체력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두뇌와 체력의 근원을 일본인은 서양인의 식습관에서 찾았다. 바로 육식 문화다. 메이지 시대(1868~1912) 이전까지 일본은 불교 국가로서 철저하게 육식을 금지했다. 몇 가지 경우에 한해 예외로 하고 있으나 현재 우리가 육식이라고 하면서 쉽게 떠올리는 소고기나 닭고기, 돼지고기는 당시 일본에서는 보기 힘든 식재료였고 먹는 것은 더더욱 금지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일본인의 식탁은 변하기 시작했다. 서양 음식이 본격 소개되면서 특히 육식 요리들이 일본에 등장했다. 1872년 천황이 육고기를 공식석상에서 직접 먹으면서 육식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 시기를 “문명 개화의 상징인 시대”라고까지 규정했다. 1200년간 금기였던 육식은 천황의 결심과 시식으로 한번에 무너졌다. 이는 메이지유신을 통해 이룩했던 사회 제도 변혁, 예를 들어 대학을 세우고 전신과 철도를 개통하고 정부의 틀을 마련하며 근대화를 앞당긴 것만큼 그 의미가 컸다.
그러나 위에서 시작된 개혁이 아래로 내려가 정착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듯 육식 문화도 일반인에게 보편화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메이지 시대로부터 60년이 흘러 쇼와 시대[2]에 이르러 육식은 여러 형태로 변하여 일본 사회에 퍼져나갔고 그 결과 ‘돈가스’가 탄생하였다. 돈가스의 탄생은 소고기 전골이나 스키야키, 고로케, 카레라이스 등과 같이 육식의 대중화를 앞당겼다. 돈가스의 탄생은 60여 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나 일본인이 “서양 요리를 소화하고 흡수하여” 자신들의 음식 문화로 바꾼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돈가스의 탄생>>은 21세기 한국 사람들에게도 익숙해진 음식인 돈가스가 태어난 과정을 일본 근대화 과정의 맥락에서 바라봄으로써 역사책에서 재미없게 소개됐던 일본 근대사를 색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독도 문제와 관련하여 반일 감정이 부풀어오른 상황에서 일본 근대사를 알아본다는 것이 어색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근대화 과정이 상당 부분 일본 근대화 과정을 답습한 부분이 있으므로 일본 근대사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국사책에서 다루듯이 무미건조하게 일본 근대사를 다루지 않고 돈가스를 통해 쉽게 일본 근대사에 다가가게 해준다. 이 책은 크게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일본인의 육식에 대한 생각을 다루고 있다. 제2장은 천황의 갑작스런 육식 이벤트를 통해 일본 사회에 불어 닥친 육식 장려 운동과 일반인이 생각한 육식 소비 문제를 다룬다. 제3장은 육식 문화가 빠르게 들어오면서 새로 생긴 식사 예법과 이에 따른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제4장은 서양인이 육식과 같이 즐겨 먹었던 빵이 일본에서 어떻게 변형되었고 그 결과로 나타난 단팥빵의 역사를 살펴본다. 5장은 육식 문화가 일반 일본인에게까지 퍼져 결국 돈가스의 탄생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6장에서는 일본의 양식 역사에 대해 정리를 해주고 있다. 각 장의 내용을 조금씩 살펴보면서 돈가스의 탄생을 일본 근대화 과정으로 투영해보자.
서양이 이룩한 근대화에 뒤쳐졌다고 생각한 일본 지도 세력은 서양 문물을 적극 받아들임과 동시에 서양인과 친해지기 위해 서양 음식을 외국 사절단과 함께 한 만찬에 도입한다. 그들에게 서양 문명은 그 찬람함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황도 그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육식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7세기 후반에 시작된 ‘살생과 육식을 금지하는 칙서’를 19세기에 천황 자신이 직접 깨기에 이른다. 천황이 이렇게까지 적극 나서자 일본의 지배 계층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천황과 지배 계층이 육식을 장려했다고 하더라도 고기 가격,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온 육식에 대한 일반인의 터부, 고기 수급 문제와 풍부한 조리법 부재 때문에 일반인은 육식에 접근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일반인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서양 요리의 틀 안에서 고기 조리법을 습득하고 일본인의 독특한 절충 양식인 ‘양식(洋食)’을 차례차례 만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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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여기서 서민들에게 육고기 조리법이 어떻게 전파되고 개선되어 나갔는지 살펴보자. 에도 시대(1603~1867) 이전부터 조금씩 육고기를 삶아 조리하던 조리법이 있었다. 남만 사람들과 왕래가 있었기 때문에 고기를 불에 굽는 조리법도 전래되었다. 그 후 지배 계층의 일부는 고기와 채소를 같이 넣어 끓이는 조리법을 통해 육고기를 먹었다. 이러한 방법을 응용해 소고기에 파, 곤약, 두부, 배추 등 식재료와 함께 간장, 설탕 등으로 조리된 소고기 전골이 나타났다. 여기에 쌀을 주식으로 한 문화가 만나면서 전골은 쌀밥에 맞는 반찬으로 변했다. 스테이크와 같이 전통적 서구식 육식 요리와 다르게 일본풍 육고기 요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소고기 섭취가 문명화의 한 척도가 되면서 소고기 전골을 전문으로 파는 가게들이 늘어났고 일반인들은 점점 육식 문화에 익숙해진다. 소고기를 조려 먹는 소고기 전골과 함께 소고기 구이도 널리 퍼졌다. 일명 ‘스키야키’라는 이 음식도 순수하게 구워먹는 수준을 넘어 야채와 곤약, 두부, 간장 등을 넣어 만든 변형된 스키야키도 등장했다.
음식 맛과 조리법 대중화와 함께 지식인들까지 육식을 장려하면서 육식은 더욱 늘어났다. 그 지식인 중 한 명이 바로 현재 일본의 ‘만엔’ 지폐의 모델인 후쿠자와 유키치다. 그는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과 긴밀한 친분 관계로 조선과 연관됐던 인물이었다. 그는 ‘육식을 말하다’라는 육식 선전문에서 “육식과 우유의 효용을 적극” 이야기하며 육식을 하지 않는 자는 몸의 궁리를 분별하지 못한다고 언급했다. 이 당시 그가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육식 권장에 관한 글은 그 의미가 컸다.
소고기를 영국 등지에서 들여와 널리 퍼뜨리려 했으나 소고기 수요가 늘어나자 그 수요를 모두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가격 문제로 소고기와 그 형태나 맛이 비슷한 말고기 요리까지 성행했다. 일부 육식 반대자들이 농사에 매우 중요한 소를 식용으로 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기도 했다. 여기에 서양 식사 예절이 까다롭고 일본의 주된 식사 도구인 젓가락이 서양의 포크나 나이프에 비해 우월하다는 주장까지 나오면서 육식 장려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육식 증가는 단순히 소고기 수요만을 늘린 것은 아니다. 말고기 수요도 증가했고 특히 돼지고기에 대한 수요가 1869년 이후 꾸준히 늘어났다. 정부는 중국에서 씨돼지를 수입하여 양돈업을 크게 권장하기에 이르렀다. 문명 개화의 이미지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돼지고기에 대하여 장려와 금지는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육식 수요가 이미 물꼬를 튼 이상 돼지고기 수요를 막을 수 없었다. 본격적으로 일본 정부는 미국과 영국에서 씨돼지를 수입하여 퍼뜨렸고 일본 양식집은 물론이고 일반인에게도 돼지고기가 “양식의 맛으로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소고기 섭취 권장에 지식인들의 도움이 한몫 했듯이 돼지고기 섭취 장려에도 그 역할을 컸다. 돼지고기에 대한 좋은 인상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돼지고기는 이제 일반인에게조차 매우 인기 있는 음식 재료가 됐으나 그 조리법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었다. 기름을 많이 사용하는 가열 조리가 많은 서양 요리는 일본인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담백한 음식을 주로 먹던 일본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이 주목한 조리법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커틀릿(cutlet)이었다. 이 커틀릿은 처음에는 소고기나 닭고기에 적용한 조리법이었다. 커틀릿은 고기를 굳이 두툼하게 하여 먹을 필요가 없는 육고기에 적합한 요리법이다. 서양의 커틀릿은 소량의 기름으로 지져내는 방식이었는데 기름을 넉넉히 넣고 튀김 재료를 기름에 잠기게 하는 요리법으로 만들어진 ‘뎀뿌라’에 익숙한 일본인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전자의 방식에는 소고기가 적합하였으나 지방이 상대적으로 많은 돼지고기는 후자의 방법이 적합하였다. 특히 돼지고기의 안심인 히레(filet)는 너무 연해 두껍게 조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돼지고기 안심을 두껍게 썰어 지방을 제거하고 나서 모양을 평평하게 만들어 튀겼다. “중간 온도에서 익히고 난 뒤 고온의 기름으로 옮겨 기름을 잘 뺀다. 열이 내부에 골고루 전달되도록 몇 분 동안 놓아두고 이를 몇 번 반복했다. 이러한 조리법으로 만들어진 음식은 나이프와 포크를 쓰지 않고 일본인에게 익숙한 젓가락을 써서 편하게 먹을 수 있게 칼로 잘라서 나왔다. 당연히 그 인기는 매우 높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돈가스가 탄생한다.
돈가스라는 명칭은 초기에는 ‘포크 커틀릿’에서 ‘포크 가쓰레쓰’로 됐다가 ‘돈가쓰레쓰’, 최종적으로 ‘돈가스’로 변한 듯 보인다. 분명한 차이는 포크 가쓰레쓰가 얇게 썬 고기에 옷을 입혀 기름에 지져내어 나이프와 포크로 먹었다면 돈가스는 두껍게 썰어, 빵가루, 밀가루, 계란으로 옷을 입혀 뎀뿌라처럼 튀겼다. 열을 조절해 음식을 만드는 문화가 발달한 일본은 돈가스에 입히는 옷까지 신경 썼다. 바삭바삭한 맛을 최대로 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빵가루 입자의 크기를 알아냈고 그 입힌 옷을 먹기 좋게 노릿하게 튀겨 내는 법을 찾아냈다. 일본식 돈가스를 전문으로 파는 식당에 가봤다면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사용한 빵가루의 입자 크기가 크고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서 나온다. 거기에 곁들여 먹는 음식으로 쌀밥이 나오지 빵이 나오진 않는다. 여기에 채쳐진 양배추가 꼭 함께 제공된다. 점차로 서양 육고기 요리가 일본의 ‘양식(洋式)’으로 변하는 과정이다. 기름에 튀겨진 돈가스는 그 느끼함을 줄여줄 두 가지 음식의 도움으로 그 인기가 날로 높아갔다. 그 중 한 가지는 양배추였고 다른 한 가지는 당시 돈가스 소스로 알려진 ‘우스터 소스’였다. 양배추와 우스터 소스는 큰 시행 착오 없이 돈가스와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이 됐다. 양배추는 17세기 후반 서양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이후 먹거리와 무관한 ‘관상용’으로 쓰이다가 ‘양식’으로 변한 돈가스와 우연한 기회에 만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양배추는 돈가스의 느끼함을 가시게 하는 데 도움이 됐다. 영국의 우스터 소스는 1898년 일본전국간장대회에서 주목을 받으면서 점차 일본식 우스터 소스로 새롭게 변신하며 돈가스에 사용됐다. 그 후 다양한 맛과 색깔의 소스가 개발됐다.
돈가스는 그 사용되는 돼지 부위에 따라 기름기가 적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한 히레(안심)가스나 고소한 맛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로스(등심)가스 등으로 나뉘기도 한다. 크기나 같이 먹는 재료에 따라 미니가스나 치즈가스, 가스덮밥, 가스카레 등이 등장했다. 특히 가스덮밥은 간편하게 먹을 수 있고 값도 저렴해 일본인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음식이다. 고등학생이 개발했다고 하는 돈가스 덮밥은 간토 대지진[3]이 발생한 직후 어려운 상황에서 더욱 많은 인기를 끌었다. 또한 특이한 음식으로 전세계 어딜 가도 보기 힘든 돈가스 고치가 있다.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고치에 다른 야채, 해산물과 같이 꼽아 튀겨내는 돈가스의 변형이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 돈가스와 함께 일본화되어 일반인에게 큰 인기를 누렸던 카레를 돈가스와 같이 먹는 돈가스 카레는 2008년 현재 한국에서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그만큼 인기를 꾸준히 이어오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7세기 후반 덴무 천황 시기에 불교의 영향으로 살생과 육식을 금지한 지 1200년이 지나 그 금기는 폐지되고 천황이 앞장 서 육식을 권장했다. 1895년 소고기와 닭고기로 만들어진 ‘가쓰레쓰’가 등장하고 60여 년이 지나서야 정식으로 ‘돈가스’가 등장하고 많은 일본인이 즐기는 음식이 되었다. 결국 2008년 현재 한국인들도 즐겨 먹는 돈가스는 그 역사가 50여 년에 불과한 음식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돈가스는 역사가 짧음에도 탄생하기에 필요했던 기간 동안 일본이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 서양 문명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 위에서부터 시작된 일본의 근대화는 지배 계층에 의해 이루어진 정치•경제•사회 제도 변혁이 한 가지 틀이었다면 문화적으로는 돈가스와 같은 ‘양식’ 문화가 서양 문명의 일본화를 보여주는 근대화의 또 다른 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지은이는 한국과 중국의 전통적인 민족 요리가 서양 음식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이러한 서양 육식 문화가 일본에 정착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한국과 중국이 서양 문물을 급격하게 받아들인 시기에 각국의 음식 문화에 서양 음식 문화가 어떻게 변하고 뿌리 내렸는지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돈가스 이외에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등장한 고로케, 카레라이스도 돈가스와 함께 비교하면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 기시모토 미오 외(지음), 김현영 외(옮김),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역사비평사, 2003년 9월)
- 김기협(지음), <<밖에서 본 한국사>> (돌베개, 2008년 3월)
- 후쿠자와 유키치(지음), 남상영 외(옮김), <<학문의 권장>> (소화, 2003년 2월)
- 강명관 (지음),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소명출판, 2007년 8월)
주
[1]메이지유신(명치유신, 일본어: 明治維新 메이지 이신[*])은 일본에서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체제로 전환된 사건이며, 근대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된 개혁을 말한다. 일본의 정치, 사회 구조를 크게 바꾼 일련의 사건들이다.
[2]일본은 천황체제이기 때문에 여전히 연호를 사용한다. 메이지 시대 이후 다이쇼, 쇼와 시대를 거쳐 현재 헤이세이 시대이다.
[3]1923년 9월 1일 11시 58분에 사가미 만을 진앙지로 발생했던 큰 지진이다. 1855년에도 대지진이 있었으나 보통 간토 대지진은 이때를 말한다(출처: 위키백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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