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와 연애 그리고 뉴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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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sinabrlo@hanmail.net
짧지 않은 뜨거운 현업 프로그래머 생활을 잠시 접고 학교로 돌아와 컴퓨터 네트워크 분야의 학위 과정을 밟고 있다. 연구 이외에 '따뜻한 디지털 세상', 'IT 갤러리' 등의 월간지에 정보통신 관련 컬럼을 정기적으로 쓰고 있으며, 근래 개발자와 이공계를 위한 글쓰기 책을 퇴고하고 있다.
2007년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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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 새로운 교과서
우리는 참으로 불확실한 세상에 살고 있다. 과거에는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들어가고 무사히 졸업하여 취직했다. 전세금이 빠듯하게 모일 때쯤 결혼해 아이를 낳아 키우고 그 아이들이 대학 갈 때쯤 정년퇴직하는 것이 삶의 한 전형이었다. 이 인생 모델에 맞추어 어떻게 살아가면 되는지에 대한 수많은 교과서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그와 같은 것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어떠한 직장도 정년을 보장해 주지 않으며 결혼도 언제든 이혼으로 끝날 수 있다. 예측했던 에러는 이내 디버깅할 수 있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곳에서 나오는 에러 메시지에는 우울과 야식이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교과서와 대응책이 필요하다.
남녀 변화의 속도
지난 추석, 친정에서 추석을 보내자는 부인과 말다툼을 하다 분에 못이긴 남편이 17층 아래로 뛰어내려 버린 사건이 있었다. 단순히 “거, 성질 급한 양반하고는” 하며 웃고 넘기기에는 내포하고 있는 시대상이 만만치 않다. 명절 당일에 시댁에 먼저 가고 전날이나 다음날 친정에 가며 명절 음식은 여자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자랐던 한국 남자들에게, 올해 추석 당일에는 친정에서 보내자는 것은 “그래 그럴까?” 하며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혼한 전 부인이나 헤어진 여자친구를 지독히 따라다니며 괴롭히다 구속된 남자들의 이야기는 포탈 메인 페이지에 올라오는 단골 기사다. 그들이 경찰서까지 끌려와 창피한 일로 기사에 실리는 데까지 이른 것은 대부분 엑스레이디(ex-lady)들을 괴롭히고 싶어서라기보다도 딱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름답고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며 남자가 주며 여자는 받고 인내하는 것이라 보고 배웠던 남자들에게 자신이 마음을 준 여자가 떠나가려는 것은 어디서도 듣도 보도 못한 날벼락 같은 일이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배운 적도, 경험해 본 바도 없기에 어떻게든 되돌리고자 행위가 극단에 이르는 것이다.
두 가지 예 모두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하면서부터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음에 기인한다. 남자의 보호 아래가 아니면 먹고살기도 힘들고 온갖 수모와 고생길이 훤하던 시대가 아니기에 여성들은 사랑을 주지 않는 남자들을 더는 참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보아 온 희생하던 어머니와 누나의 상을 자신의 짝에게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여자들에 비해 남자들은 남녀 관계의 시대 변화에 확실히 둔감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이 수천 년 전부터 세상을 지배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 같은 세상이 계속되리라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급할 것이 없다. 남녀 관계에서 느긋한 남자에 비해 여자는 매우 경제적이고 현실적이다. 대표적인 예가 배우자를 고를 때다. 결혼에서도 여자들은 매우 현실적이다. 보통 여자들은 강하게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자기보다 여러모로 나은 남자를 고른다. 반면 남자들은 객관적이고 냉정하지 못함을 호탕함이라는 말로 덮는 경향이 짙다. 더더구나 남자들 투성인 개발자 사회에서는 이 같은 경향은 관습처럼 일반적이다.
보통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쪽이 더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쉽지 않겠지만 남자들도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특히 여성과의 교류가 극히 적어 여자라면 아찔해지는 남자 개발자 종족은 더더욱 그럴 필요가 있다.
바뀐 아이들의 꿈
우리가 배웠던 교과서에는 농업의 1차 산업에서 물건을 만드는 제조업의 2차 산업, 그리고 서비스 산업의 3차 산업까지가 적혀 있었다. 그래서 선진국일수록 3차 산업의 비중이 높다며 우리도 3차 산업으로 가야 한다고 정치•경제 선생님이 열변을 토했던 모습이 선하다. 새 시대의 교과서에는 4차 산업이 등장해야 할 것이다. 바로 ‘투자’ 산업이다.
‘네트워크 마케팅’하면 근사해 보이지만 결국 ‘다단계’의 다른 명칭이듯, 투자라는 말도 근사해 보이지만 사실 일반 국민 용어로 풀어쓰면 결국 ‘재테크’와 같은 뜻의 낱말이다. 몇 년 전부터 아이들에게도 경제 개념을 넣어 주어야 한다며 난리인데, 여기서 말하는 경제 개념도 결국엔 재테크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아이들에게 부여되는 꿈은 대통령도, 의사도, 선생님도 아니다. 그저 재테크 잘해서 부자가 되어 일찍 은퇴해, 멋진 요트 타고 세계 일주하는 것이 꿈인 세상이 되어 버렸다.
전세계에 재테크 광풍을 몰고 온 일등 공신의 하나인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지은이 로버트 기요사키는 부자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산이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그럼 어떻게 수익이 생긴다는 것인가. 이것은 누군가 그를 대신해 일을 해주기에 가능한 것이다. 투자와 재테크란 내가 흘리지 않은 땀으로 수익을 얻겠다는 것으로, 본질은 결국 약한 희생양을 찾아 그들에게 나를 위해 일하도록 일을 지우는 것이다. 그게 이웃의 가난한 사람일 수도, 원석을 캐는 아프리카 사람일 수도, 항의를 할 수 없는 자연일 수도, 아니면 내 후손들일 수도 있다.
부동산을 보면, 서울 사람은 지방 사람을, 나이 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의 땀으로 자신의 자산을 불리는 형상이다. 가장이 1년 내내 열심히 일해 땀으로 벌어들인 돈보다 부동산과 부녀회를 기웃거리며 올린 부동산 수익이 더 큰 세상이다. 그리고 이를 거리낌 없이 이웃에 자랑하며 또 그런 자랑을 부러워하는 것이 우리네 풍토다. 이런 자랑은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던 젊은이들이 뒤를 돌아보게 한다.
재테크의 메커니즘
SLR 카메라 렌즈는 흔히 현금과 같다고 한다. 새 것을 사건 중고를 사건 가격이 잘 안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새 제품이 계속 생산되는데 중고가격이 내려가지 않는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비밀은 SLR 카메라 인구가 계속 늘고 있다는 데 있다. 신제품이 공급되어도 늘어나는 동호인에 비해 부족하기 때문에 가게에는 늘 렌즈가 모자란다. 그러니 중고가 장터에 뜨기만 하면 거의 실시간으로 팔려 버린다. 그렇지만, 언젠가 정점을 찍으면 ‘똑딱이’ 디지털 카메라가 그랬듯이 SLR 동호인 수도 포화될 것이고 시장에 나오는 중고와 새 제품은 주인을 즉각 만나지 못해 가격 하락을 면치 못할 것이다. 예전 보급형 노트북이 소개되면서 노트북 수요가 폭발할 때도 똑같은 현상이 있었다.
재테크를 강조하는 전문가들과 그들의 책들이 그렇게도 재테크를 하라고 종용하는 것도 같은 메커니즘이다. 바로 많은 사람이 재테크를 해야 이미 자산을 사둔 자기들이 이익을 보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가 산 주식을 추천하는 주식분석가와 다를 바가 없다. 부동산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믿음도 여기서 출발한다. 인구는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다. 서울의 집값이 아무리 세금을 매겨도 오르는 이유가 있다.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가 졸업하여 짝을 이루니 집을 구해야 하는 수요가 엄청난데다 타지역 사람들이 끊임없이 서울로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떨어져서 보면 이런 믿음도 얼마나 갈 수 있을지 갸우뚱해지지 않을 수 없다. 시대는 변하고 있다.
떨어지지 않는다는 믿음
올 초 출장으로 호주에 가는 비행기 옆자리에 20대 초반의 일본인 남자와 동석하게 되었다. 통성명을 하니 도쿄 소재의 한 대학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하는 3학년 학생이었는데 졸업 여행으로 한 달간 호주를 일주할 계획이란다. 휴학도 군대도 어학연수도 필수가 아닌 일본의 사정상 아직 앳되어 보이는데 3학년 졸업 여행이라니 “벌써?” 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웬걸. 이미 오토바이, 전자 악기를 비롯한 즐거운 어른 장난감을 만드는 회사인 ‘야마하’에 취직이 되어 맘 편히 놀다 오려는 것이란다. 호주에 도착해 만난 오사카 대학교 의공학과의 시게히로 하시모토 교수는 비행기에서 만난 그 청년의 이야기와 다시 기지개를 켜는 일본이 부럽다는 필자의 건넴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건 바로 인구 때문이에요. 아래가 홀쭉한 인구구성도 알죠? 그 홀쭉한 부분의 젊은이들이 이제 졸업하기 시작한 겁니다. 일할 젊은이들이 없으니 안달난 것은 오히려 일군을 데려와야 하는 기업들인 것이지요.”
하시모토 교수와 대화를 나누면서 청년들이 취업 걱정이 없는 날이 한국에도 올 것이라는 결론에 자연스레 도달하게 되었다. 한국의 출산율은 현재 일본보다도 더 낮기 때문이다. 또한, 1992년부터 지금까지도 부동산 가격이 내려가고 있는 일본처럼 치안이 좋은 서울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주거 부동산 가격은 점차 내려갈 것이다. 집을 구해야 하는 젊은이가 이내 반 토막 나버리기 때문이다. 필자는 감히 청년 실업률과 부동산 가격이 비례 연동할 것이라 예견한다.
플라토닉 섹스
이지마 아이의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아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 [[플라토닉 섹스]]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AV 배우에서 오버그라운드로 진출한 거의 첫 사례가 되었다. 아이는 유명 TV 프로그램인 런던하트의 출연진으로도 잘 알려졌다.
그 책에 따르면 아이는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일본이 부동산 거품으로 초호황을 누릴 당시 고급 술집의 호스티스로 일했다. 몇억, 몇십억씩 공돈이 생긴 남정네들이 젊은 여자가 말벗이 되어주는 비싼 술집에서 바가지 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고급 술집은 대호황을 맞이 하였다. 짧은 기간에 큰돈을 버는 일이 그렇듯이, 큰 빚이 있던 아이는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술집들이 문을 닫자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어졌다. 야쿠자가 있는 일본의 채권 추심이 얼마나 심했을 지는 가히 상상이 간다. 젊은 여자가 큰돈을 갚을 길은 그 길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예쁜 처자들이 좋은 남자 만나 시집이나 잘 가지 왜 이런 걸 찍나 한 번쯤 의아해 했을 것이다. 그 근간에 부동산 거품 붕괴가 한 축을 담당했다. IMF 이후 난립하던 한국 성인 방송의 타이밍과도 절묘하게 일치한다.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터지는 사고는 쉽게 디버깅하기 어려우며 슬픈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인상적인 것은 거품 붕괴 직전 아이의 뉴욕에 대한 동경이다. 근래 대형 서점에 잘 팔린다는 복도 근처 가판에 표지를 드러내고 깔린 젊은 여자들의 좌충우돌 뉴욕 생활하기 유의 책들을 볼 때마다 아이의 이야기와 겹쳐진다. 쓰나미 직전 비둘기와 까마귀가 사라지는 것과 같은 전조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갑작스러운 것은 없다. 단지, 내가 잠들어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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